[공무원 한국사] 7. 고대 사회의 발전 3. 대외 항쟁과 삼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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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항쟁과 삼국 통일

[공무원 한국사] 7. 고대 사회의 발전 3. 대외 항쟁과 삼국 통일

1. 수, 당과의 전쟁

  1. 여, 수 전쟁 : 중국을 통일한 수(589)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점차 높아졌습니다.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요서 지방에 대한 선제 공격을 취했습니다.

    영양왕 9년(598)에 1만 명의 말갈 병사를 보내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가 수군과 육군 도합 30만의 군대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요하를 굳게 지켜서 문제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이후 수 양제는 113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최일선인 요동성을 공격(612)했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실패하자, 30만의 별동부대를 보내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으나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에서 대패하였습니다.

    수나라는 그 후에도 두 차례나 거듭 침략해왔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국력 소모로 결국 나라가 망하고(618), 수의 뒤를 이어 당이 건국되었습니다(618).

  2. 여, 당 전쟁 :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 작업과 민심의 수습 등을 위해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 관계를 통해 도교가 전래(624)되었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습니다.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자, 고구려는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천리장성은 영류왕 14년(631)부터 보장왕 6년(647)까지 16년 공사한 끝에 완성한 성으로 북단은 부여성이며, 남단은 비사성입니다. 천리장성의 핵심부는 요동성이고, 북방의 백암성과 남방의 안시성은 배후 산성으로서 고구려 수비를 책임지는 요충이었습니다.  한편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한 다음 스스로 최고 관직인 막리지에 올라 무단 독재 정치를 행하고, 국수적 성격의 도교를 권장했습니다.

    당의 사농승 상리현장이 고구려에 와서 백제와 더불어 전쟁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다시 신라를 치면 출병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탈취해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 한 신라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당의 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요동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습니다.

    당 태종은 보장왕 4년(645)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개모성, 요동성, 비사성 등을 함락하고, 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성주인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수비군이 3개월간이나 완강하게 저항하여 격퇴하였습니다. 당 태종은 그 이후에도 647년, 648년 연이어 원정군을 보냈으나 번번이 패퇴했습니다. 고구려가 수, 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큽니다.

2. 7세기 신라

  1. 선덕여왕(632~647) : 선덕여왕은 분황사 모전 석탑(634), 황룡사 9층 목탑(645), 첨성대를 건립하였습니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등이 반란(647)을 일으켰으나 김춘추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고구려가 수, 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백제는 계속 신라를 공격해 신라 서쪽 지방의 40개 성을 빼앗았습니다(642). 백제 장군 윤충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서 성주 품석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갔습니다.

     위기를 느낀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고자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출병의 대가로 먼저 고구려 땅이었던 죽령 이북 한강 유역의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탈취(643)해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려 하였습니다.

  2. 진덕여왕(647~654) : 진덕여왕 5년(651)에 왕명을 집행하던 집사부와 그 상관으로 시중이 설치되면서 귀족의 대표자인 상대등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왕과 관료의 권한이 신장되었습니다. 또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 동맹을 성사시켰습니다.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군사를 파견하고, 신라는 대동강 이북 지역을 당에 넘겨준다는 비밀 약속을 하였습니다.

3. 신라의 삼국 통일

  1. 무열왕(654~661) : 선덕여왕 때 귀족인 상대등 비담의 반란(647)을 진압하고, 또  상대등 알천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처음으로 진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열왕은 가야 출신의 신김씨인 김유신의 누이를 왕비로 맞이했으므로 종전의 왕비족인 박씨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무열왕은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손하였습니다. 왕의 동생들에게 특권적 지워를 부여하던 갈문왕 제도를 폐지하고,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중국식 시호, 즉 태종 무열왕과 같은 유교식 왕명을 사용하였습니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르 침입하였습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했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군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비성의 입지 조건이 방어에 매우 취약하고, 저항 세력이 국내와 일본 등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힘의 결집이 부족한 것이 패망의 큰 원인이었습니다(660).

  2. 문무왕(661~681) : 당은 경주에 계림대도독부(663)를 두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은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복신과 흑치상지, 승려 도침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습니다.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여 약 3만 명의 왜의 수군이 백촌강에 도착해서 싸웠으나 패배하였습니다. 여기에 복신과 왕자, 도침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결국 주류성이 함락되고(663), 뒤이어 지수신이 있던 임존성마저 함락되어(665) 4년 간에 걸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아(666) 백제 유민을 무마하고 신라를 견제하게 했습니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동북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당은 고구려의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두어(668) 직접 지배하려 하였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장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신라는 검모장의 고구려 부흥 운동을 후원하였고, 670년 안승이 검모장을 죽인 다음 4000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자, 금마저에 머무르게 하고 보덕국왕으로 임명했습니다(674). 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다시 탈환하고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신라는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675) 나, 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676),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민심의 성을 쌓아야 나라가 편안해진다는 의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드러운 문치를 지향하여 시호에 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하나의 국가 아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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