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와 해답
꾸준히 제기되는 여덟 가지 문제점들을 검토해본다
흥미를 잘하면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관객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관객을 단단히 붙잡아두다가 절정에서 충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호기심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양식을 완결지으려는 지적인 욕구이다. 이야기는 이 과정을 뒤집어 질문을 던지고 어떤 상황을 개시함으로써 이 보편적인 욕망에 장난을 건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매번 관객의 호기심을 낚아챈다
관심은 삶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원하는 감정적인 욕구이다. 정의, 강건함, 생존, 사랑, 진실, 용기 등… 이야기가 시작되면 관객은 의식적으로나 본능적으로 인물과 주변 상황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는지 점검한다.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등을 구별하려 애쓴다. 선의 중심을 찾는 이유는 사람이 누구나 스스로 선하거나 옳다고 믿고 자신을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떻든지 선의 중심은 반드시 주인공이어야 한다. 다른 인물들과도 감정 이입이 가능할 수 있지만 주인공과는 반드시 감정 이입이 되어야 한다. 물론 선의 중심이라고 해서 착하다는 것은 아니다. 선을 규정할 때에는 선한 것만큼이나 선하지 않는 것이 크게 작용하는데, 이런 부정성과 관련해서 관객의 관점에서 내린다.
호기심과 관심은 관객과 이야기를 연결하는 세 가지 방법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미스터리, 서스펜스, 극적인 아이러니다.
미스터리에서는 인물들이 관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미스터리는 호기심만으로 관객의 흥미를 얻는 방법을 말한다. 작가는 해설적인 사실들을 만들어내어 감춰둔다. 특히 배경 이야기의 사실들이 그렇다. 과거의 사건에 대해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음 진실을 언뜻 암시만 해주고는 일부러 그대로 묻어둔다. 그러고는 곁길로 새는 이야기로 관객의 주의를 돌려서 진짜 사실을 감추는 동안 관객이 가짜 사실을 믿거나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곁길로 새는 이야기라는 말은 본래 ‘훈제 청어(red herrings)’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곁길로 새는 이야기와 의심, 또는 혼란과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작가는 일종의 추측 게임을 고안해 낸다. 살인 사건 미스터리 장르가 보통 이렇다.
서스펜스에서는 관객과 인물이 똑같은 정보를 갖고 있다. 서스펜스는 호기심과 관심을 함께 결합시킨다. 서스펜스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과 인물들이 나란히 움직이며 같은 지식을 공유한다. 인물이 해설적인 사실을 발견하면 관객도 발견하지만 결과는 모른다. 이런 관계에서는 관객의 감정이 주인공에게 이입되고 동화된다. 반면 단순한 미스터리에서는 관객의 참여는 동정심으로 그친다. 관객은 명탐정들과 동화하지 않는다.
극적인 아이러니에서는 관객이 인물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극적인 아이러니는 사실이나 결과에 대한 호기심을 제외하고 주로 관심을 통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종종 결말에 대해 감추려 하지 않고 일부러 결과를 누설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인 우월함이 관객에게 부여되면서 관객의 감정적인 경험이 뒤바뀐다.
서스펜스에서는 관객은 주인공의 안전을 염려하며 결과를 불안해하지만 극적인 아이러니에서 관객의 감정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인물이 뒤늦게 발견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며 인물이 재난을 향해 가는 걸 보며 연민을 품게 된다. 극적인 아이러니는 인물의 삶에 작용하는 동기와 인과 관계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도록 관객을 자극한다. 연민과 두려움이라는 흔히 쓰이지 않는 감정들을 풀어놓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 결과에 대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내적인 삶과 무의식적인 에너지와 사회의 미묘한 작용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대다수의 장르는 서스펜스적인 관계 안에서 나머지 둘을 혼합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관객의 호기심은 어느 정도 필수적이다. 호기심 없이는 내러티브 동력이 삐걱대다 멈춰서게 된다. 물론 지저분한 속임수나 허위 미스터리는 금물이다.
놀라는 데도 두 종류가 있다. 싸구려 깜빡쇼와 참된 놀라움이다. 참된 놀라움은 기대와 결과 간의 간극이 불시에 드러나는 데에서 생긴다. 이게 ‘참된’ 이유는 이 놀라움 뒤로 통찰이 밀려들면서 허구 세계의 표면 밑에 감추어졌던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깜짝쇼는 관객의 약점을 이용한다. 불시에 당혹스럽게 내러티브의 흐름을 깨뜨리면 언제나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행동을 당장 할 듯하면서 안 하는 게 제일 나쁘다. 이건 비극적이지 않은 충격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 역시 삶의 일부이다. 이는 우리의 존재를 흔들어놓고는 불합리하게 나타난 그대로 불합리하게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연의 일치를 기피하는 게 아니라 극안에 융화시키는 것이 좋다. 어떻게 무의미하게 삶에 들어왔다가 차츰 의미를 획득하는지, 어떻게 무작위성이라는 반논리가 실제 그대로의 삶이라는 논리로 바뀌는지를 극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드라마와는 달리 코미디는 작가가 내러티브 동력이나 자꾸 앞을 상상하는 관객의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구성상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장면을 이야기 중간에 끼워놓어도 괜찮다. 그냥 웃자고 넣는 것이다. 때로는 억지스러운 돌발도 허용한다. 단,
시나리오 작가에게 시점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때때로 시점 숏이 필요하다. 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작가의 시선이다. 전체 이야기는 어떤 관점, 어떤 시점에서 진행되는가?
인물에 들이는 시간이 많을수록 인물의 다양한 행동을 찾아낼 기회도 많아진다. 결과적으로 인물에 대한 관객의 감정 이입이나 정서적인 끌림도 더 강해진다.
각색의 첫째 원칙은 ‘소설이나 희곡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영화에는 더 불리하다.’ 소설의 순수함이란 주로 이야기가 내적 갈등의 층위에서 전개되면서 언어의 정교함으로 이야기의 발단, 전개, 절정을 이끌어간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개인적, 사회적, 환경적 세력들은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순수한 문학을 개작하려는 의도가 실패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미학적인 불가능성 때문이다. 위대한 소설가나 희곡 작가들의 화려한 언어에 담긴 것들을 그대로 혹은 비슷하게라도 영화적으로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둘째는 천재보다 못한 사람이 천재의 작품을 각색하려하기 때문이다.
각색을 하려면 우선 작품을 반복해서 읽어라. 작품의 정신이 자기 안에 흠씬 배어들었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메모도 남기지 말아라. 작품 안의 세계에 직접 부딪치고 그 인물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의 향수 냄새를 맡아보기 전까지는 선택도 내리지 말고 구성을 설계하지도 마라. 이야기를 쓸 때처럼 무에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후 매 사건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간단히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라. 이것들을 다 끝내고 나면 사건들을 죽 읽어 내려가면서 ‘이게 잘 쓰여진 이야기인가’ 질문을 던져라. 어지간하면 부정적인 답이 나온다.
각색의 둘째 원칙은 ‘재창조하기를 꺼리지 마라’이다. 원작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영화적인 리듬에 맞게 다시 써라. 재창조한다 함은 소설에서 어떤 순서로 사건을 전개하든지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대기처럼 사건을 재배열하라는 말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단계별 개요를 각성하라. 원작의 구성을 빌려와도 괜찮지만 필요하면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넣어라. 그 후 정신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변화시켜라. 자명한 대사로 인물의 입을 채우지 말고 대신 그들의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아라.
멜로 드라마는 과잉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 부여가 빈약한 데서 비롯된다. 너무 큰 얘기를 써서가 아니라 너무 작은 욕망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동기가 부족하다기보다 이야기에 논리가 부족하다고 보이면 인과 관계의 사슬에서 고리 하나가 빠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가 그렇듯 이런 결함도 삶의 일부이다. 그러니 삶에 대해 글을 쓰는 중이라면 결함 한두 가지쯤은 이야기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