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국사] 10.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3. 발해.

발해

[공무원 한국사] 10.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3. 발해.

1. 고구려 계승 의식

  1. 발해의 건국 : 당의 요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진국(698)을 세웠습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합니다.

  2. 고구려 계승 의식 : 발해는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습니다. 대조영의 출신은 신라고기와 제왕운기에서 고구려 장수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를 비롯하여 고구려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했습니다. 또 일본에 조문사를 보내면서 스스로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하였고, 같은 해에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려국왕'이라 하였습니다.

    발해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다면,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발해와 신라의 공존 시대를 상정하고 이를 '남북국 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정조 8년(1784)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남북사'의 용어를 쓰면서 제기되었고, 고종 1년(1864) 김정호는 대종지지에서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씀으로써 그 당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2. 발해의 발전

  1. 고왕(698~719) : 대조영은 시호가 고왕이며, 천통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가 건국된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합니다. 건국 직후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상호 대립하던 당과 돌궐이 711년 화친 관계로 돌아서자 발해도 당과 713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때 당은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임명했고,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 무왕(719~737) : 대무예는 시호가 무왕이며,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발해는 먼저 732년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습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막아내기 위해 처음에는 북으로 돌궐과 통하고, 남으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3. 문왕(737~793) : 대흠무는 시호가 문왕이며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문왕은 문물제도의 정비와 함께 수도를 새롭게 조영하였습니다. 755년에 수도를 중경 현덕부(지금 길림성 화룡현)에서 북쪽 상경 용천부(지금 흑룡강성 영안현)로 옮겼습니다. 785년에는 다시 동경 용원부(지금 길림성 훈춘시)로 또 수도를 옮겼습니다. 이후 8세기 말 성왕은 다시 수도를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겼습니다.

    또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어 762년 당은 대흠무를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습니다. 790년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일본에게 천손임을 자랑하고, 황상이라는 칭호를 쓰면서 황제 국가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4. 선왕(818~830) :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인 대인수는 시호가 선왕이며, 건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만주 중부, 북쪽으로 흑룡강 일대와 송화강의 중하류 지역을 포괄하여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습니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습니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9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국세가 약화되고 반대로 발해의 국세가 강화되면서, 당에서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의를 지키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 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상호 경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897년에는 발해가 신라 사신의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했습니다. 869년부터 873년 발해 오소도와 신라 이동 사이에 당 빈공과에서의 수석 다툼이 벌어졌으며, 906년에도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5. 10세기 :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926).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은 이곳에 동단국을 세우고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하였으며, 928년에는 동단국을 옮기면서 이를 따라 발해 유민들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은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 상경 용천부 지역의 후발해국, 오사국, 흥요국 등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렇게 발해 유민의 저항은 멸망 후 200여 년이 지난 뒤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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