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정치 1,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의 통치 체제에 대해서 다룹니다. 삼국의 중앙 통치 조직, 삼국의 행정 구역, 삼국의 군사 제도에 대해서 쓸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1. 삼국의 중앙 통치 조직
- 관등 : 관등제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한 것으로,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 관계를 이룬 것입니다. 삼국의 관등제는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습니다. 삼국에서 신분제 하면 골품제가 유명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다 비슷한 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처음에 10관등을 두었다가 후에 14관등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고구려 관등 조직은 형(족장 출신)과 사자(관료 출신)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고이왕 때 이미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 틀이 있었습니다. 좌평 및 달솔까지의 솔 계열, 장덕으로부터 대덕까지의 덕 계열, 문덕 이하의 무명 계열의 세 단계로 구분됩니다. 이들은 각기 자, 비, 청색의 3색 관복으로 구별합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에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습니다. 귀족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에 사는 지배층은 경위 17관등을 수여하였습니다. 지방 지배 세력에게는 따로 외위를 주었습니다. 외위제는 문무왕 14년(674)에 소멸되었습니다. - 중앙 관제 : 우선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을 고구려는 국상, 대대로, 막리지 등으로 부르고, 백제는 좌평, 신라는 각간(혹은 서발한)이라 불렀습니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정비된 정치 조직을 갖추었습니다. 중국의 6전제를 모방한 6좌평 제도를 두었고, 후기 성왕 때 6좌평 이외에 다시 내관 12부, 외간 10부의 22부가 더 설치되었습니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법흥왕 3년에 병부, 진흥왕 26년에 정무의 중심기관으로 품주가 설치되고, 국무가 복잡해짐에 따라 점차 여러 관부가 분화, 증치되었습니다. 진평왕 때에는 위화부와 조부, 예부가 설치되고, 진덕여왕 5년에는 기존의 품주가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은 집사부와 재정을 관장한 창부로 분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합의 제도
고구려는 수상 대대로를 임명할 때 귀족인 가들이 선출했으며, 제5관등인 조의두대형 이상 귀족들이 회의에서 주요 국사를 처리했습니다.
백제는 정사암으로 불리는 넓은 바위에 둘러앉아 귀족들이 회의를 열고 수상을 선거했다고 합니다.
신라의 화백회의는 진골 출신인 대등으로 구성되고, 상대등을 의장으로 하는 회의체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화백은 각 집단의 부정을 방지하고, 그 집단의 단결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귀족 세력과 왕권 사이에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도 가졌습니다. 혹은 왕권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2. 삼국의 행정 구역
- 왕경 : 왕경에도 행정 구역을 두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5부, 신라는 6부를 두었습니다. 신라는 5세기 말에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습니다.
- 지방 행정 구역 :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습니다.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을 성주 혹은 지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방관은 큰 곳에만 파견되었습니다. 말단 행정 단위인 행정촌은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습니다. 그에 따라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전국을 5부로 나누고 각 부는 욕살이라고 불리는 지방 장관이 대성에 머물면서 다스렸습니다. 각 부에는 여러 성이 달려 있어 각기 처려근지 또는 도사라고 불리는 성주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이것이 뒤에 중국식으로 바뀌어 군이라 칭하여졌습니다.
백제는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각 방마다 방성을 두어 다스렸습니다. 방성에는 방령이 700~1200명의 군대를 통솔하면서 방을 다스렸습니다. 방 아래에는 군을 두었는데 군장 3인이 다스렸습니다.
신라는 지증왕 6년에 처음으로 실직주로 설치된 후 진흥왕 대까지 사벌주, 신주, 비사벌주, 비열홀주를 합하여 5주가 설립되었습니다. 주의 장관은 군사 지휘권자의 의미를 갖는 군주라 불렸고, 주 밑에는 군이 있어 당주가 파견되었습니다. - 특수 행정 구역
고구려에는 3경이 있었는데 수도인 평양성, 이전의 수도였던 국내성, 그리고 한성을 말합니다.
백제는 전국에 22개의 담로가 있었는데 왕자와 왕족이 파견되어 지방을 통치했습니다.
신라는 지증왕 15년에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한 이후 진흥왕 18년에 국원경을 설치하고, 선덕여왕 8년에는 동원경을 설치하고 그 장관을 사신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고 지방 통치의 거점이라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입니다.
3. 삼국의 군사 제도
군대의 최고 사령관은 왕으로서, 왕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중앙군은 왕경인으로 구성된 핵심 정예병이었고, 최상급 지휘관은 왕경의 최고급 귀족이 맡았습니다. 한편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습니다.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 고구려는 수도 5부에 일정한 수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군으로서 수도의 방위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지방관은 해방 지역의 지방군을 통솔하는 역할도 가졌습니다.
- 백제는 수도 5부에 각각 배치된 부대가 있었는데 수도의 방위와 경찰의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부대들은 각각 500명으로 구성되었고 달솔의 관등 소지인이 지휘하였습니다. 지방 군사 조직으로는 5방의 방성에 700~12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방령의 통솔을 받았습니다.
- 신라의 6부병은 왕경의 6부인으로 편성된 부대로서, 신라 초기 영토 확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6정이 국방의 핵심을 맡았는데 진골 출신의 장군이 지휘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 6정의 군단장인 군주는 군, 성, 촌의 군사력을 모두 동원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신라에는 정 외에도 일종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서당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