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국사] 9.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2. 후삼국의 성립

후삼국의 성립

[공무원 한국사] 9.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2. 후삼국의 성립

  1. 후백제 :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효공왕 4년(900)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후백제는 오와 월 등 남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습니다.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후고구려 :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901).

    후고구려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는 무태로 하였습니다. 효공왕 9년(905)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효공왕 15년(911)에 국호를 태봉으로 또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했습니다가 914년에 연호를 다시 정개라 했습니다.

    궁예는 광평성 등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습니다. 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뒤로 태봉국은 그 세력이 더욱 커져서 북으로 대동강에서 남으로 상주, 공주 등지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신라 및 백제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궁예는 지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조세를 지나치게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습니다.

  3. 고려 : 왕건은 강화의 혈구진, 평산의 패강진 등 경기만 일대의 무장, 상인들과도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어서, 실제로 황해도와 경기도 연안 지역의 상권과 해상권을 넓게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궁예를 몰아낸 뒤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918)라 하고, 연호를 천수로 고쳤으며,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일단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기 위해 지방의 유력한 호족 및 호족 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하고, 유력자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였습니다. 또 태조는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었습니다.

    태조 6년(923) 후량과 후당 등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북중국 5대와 교섭을 강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와 월 등 남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후백제를 견제하고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또 태조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후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냄으로써 신라인의 인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4. 민족의 재통일 : 발해가 거란에 멸망(926)당했을 때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습니다. 발해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합류하였고(934),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주었습니다. 또 왕계로 하여금 발해 선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도록 해줌으로써, 고려와 발해는 정신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경순왕은 후삼국 통일의 대세가 고려로 기울었음을 알고 귀족들과 상의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935). 태조는 경순왕도 융숭하게 대접하여 벼슬은 태자와 같게 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삼아 그대로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신라 귀족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고려의 신하로 삼았습니다.

    한편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맏아들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부왕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금산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나주로 도망쳤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태조 왕건은 큰 배를 보내 견훤을 개경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태조는 견훤에게 가장 높은 벼슬을 주고 양주 지방을 식읍으로 주어 극진히 대우하였습니다.

    신라를 통합한 고려는 내분에 빠진 후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는 일선군(선산)의 일리천에서 벌어졌습니다. 고려는 후퇴하는 후백제군을 황산(논산)까지 추격하여 항복시켜 마침내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936).
  • 견훤 : 견훤은 신라의 중앙군이 되어 경주에 진출하였고 서남해의 방수군 비장으로 출세하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상세력이나 초적세력을 자신의 군사적 기반으로 흡수한 후 나주를 거쳐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여 900년에는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진성여왕 3년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를 점령하였으나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신라의 지방관임을 자처하여 신라 왕조의 권위나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진성여왕 6년에는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6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우가 들어와 책사가 되었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웁니다.
  • 궁예 :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진성여왕 6년 기원, 북원의 양길에게 투신하였습니다. 진성여왕 10년(896) 철원에서 세력 기반을 확립한 후 송악의 왕건이 귀부하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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