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발전

[공무원 한국사] 6. 고대 사회의 발전 2. 삼국의 발전

삼국의 발전

[공무원 한국사] 6. 고대 사회의 발전 2. 삼국의 발전

1. 4세기

1. 고구려

  1. 미천왕(300~331) :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중국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하여 확보하고, 낙랑군을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 고국원왕(331~371) : 고국원왕 시기에 전영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342) 궁궐이 불타고, 미천왕의 시체가 도굴당하고, 왕의 생모와 남녀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국난을 당했습니다. 고국원왕 41년(371)에는 남쪽에서 북진 정책을 펴고 있던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전사하였습니다.

  3. 소수림왕(371~384) : 소수림왕은 불교의 공인(372), 태학의 설립, 율령 반포(373)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중국의 고급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층 수준 높은 고대 귀족 국가로 성장했음을 의미합니다.

2. 백제

  1. 근초고왕(346~375) :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습니다.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경상남도,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를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백제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습니다. 요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 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해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습니다. 왕비족도 8개의 귀족 성씨 중에서 진씨로 고정되었습니다. 한편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한 것도 강화된 왕권과 정비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책이 뒤에 일본서기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 근초고왕 24년(369)에 왜왕에게 하사한 칼인 칠지도를 보면 근초고왕은 왜왕을 제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아직기가 일본에 건너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고 경사를 가르친 것도 이 시기입니다. 372년에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에 책봉되기도 하였습니다.

  2. 침류왕(384~385) :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습니다.

3. 신라

  1. 내물왕 : 내물왕 44년(399)에 왜병이 국경 안으로 들어오자 고구려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신라는 이듬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와 함께 왜병을 섬멸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신라 구원 및 수호를 명분으로 삼아 신라 영토 안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구려는 이 주둔군을 기반으로 하여 신라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는 등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갔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갔습니다.
    * 호우명 그릇 :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바닥에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2. 5세기

1. 고구려

 소수림왕 때의 내졍 개혁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고구려는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1. 광개토왕(391~413) :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여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로 진격하였습니다. 패배한 백제는 남녀 1000명과 좋은 베 1000필을 바치고 항복하였습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입니다. 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신라와 왜, 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광개토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세워 영락이라 하고, 죽은 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 광개토왕은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숙신을 정복했습니다. 광개토왕 10년(400)에 후연왕 모용성이 왕의 무례함을 구실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고구려는 후연의 침공에 강력히 개처하여 후연에 대한 응징을 전개했습니다.

  2. 장수왕(413~491) : 장수왕은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해 장수왕 3년(414)에 만주 집안현 통구에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또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늘어난 영토에 맞추어 다시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도읍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천도는 기존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책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위기를 느낀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어 대항하였습니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하였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장수왕은 몽골 고원의 유연 및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습니다. 북중국의 북위와도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했습니다. 북연 왕이 의탁해오자 장수왕은 북연 왕을 영토 내에 머무르게 하고 그를 제후로 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강력한 국력을 배경으로 유연과 함께 대흥안령의 지두우 분할 점령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3. 문자왕(491~519) : 문자왕은 부여를 복속(494)시켰고 나제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 작전을 방해하였습니다.

    *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2. 백제

  1. 비유왕(427~455) :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여 신라와 나제동맹(433)을 맺었습니다.

  2. 개로왕(455~475) : 개로왕 18년(472)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청했으나(개로왕의 국시)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475) 개로왕은 붙잡혀 죽었습니다.

  3. 문주왕(475~477) : 문주왕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차령 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475) 또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4. 동성왕(479~501) :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남제와 수교(484)하고, 다음 해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어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라와 친선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비로 맞이하여 결혼 동맹(493)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응하였습니다. 다만 외척 세력을 배재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웅진 지방의 토착 세력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신진 세력(백가)에게 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3. 신라

  1. 눌지왕(417~458) : 눌지왕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 비유왕과 나제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눌지왕 때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라는 승려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고, 그 후 양나라 사신이자 승려인 원표가 경주에 오면서 비로소 왕실에 불교를 전해졌습니다.

  2. 자비왕(458~479) : 왕경의 방리명을 정하여 수도를 정비하였습니다(469).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군사를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475).

  3. 소지왕(479~500) : 사방에 우역(487)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습니다. 왕경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490)를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습니다.

3. 6세기

1. 고구려

  1. 양원왕(545~559) :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 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또 돌궐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자 이를 격파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력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기게됩니다(551).

  2. 귀족 연립 체제 : 불안한 정국 속에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유력한 귀족들이 정치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 연립 정권을 성립시켰습니다. 귀족 연립 정권을 운영하는 가장 중심적인 기구는 귀족회의였습니다. 귀족회의 의장은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인 대대로였습니다. 귀족들은 대대로의 선임 과정에서 세력 관계를 조정하면서 정치 운영을 장악하였습니다.

2. 백제

  1. 무령왕(501~523) :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무령왕은 친히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위천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습니다(512). 또 남원, 임실에서부터 하동에 이르는 섬진간 유역 지대를 지배하고 귀속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가야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의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남북조 중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양나라와 화친하여 국가를 안정시켰습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군사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습니다.

  2. 성왕(523~554) :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538). 웅진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도였으므로 백제가 새로운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보다 넓은 곳에 새 수도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중앙 관청 22부와 수도 5부, 지방은 5방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습니다.
     성왕은 중국의 남조 양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노리사치계를 파견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552)하기도 하였습니다.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551)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겼습니다(553). 성왕은 백제군과 대가야군 및 1천여 명의 왜군을 포함한 3만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다가(554)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3. 신라

  1. 지증왕(500~514) : 지증왕 때 처음으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시작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순장을 금지하여 농사 지을 인구를 확보하였습니다. 또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습니다(512).

  2. 법흥왕(514~540) :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517)하여 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율령을 공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520)하여 귀족을 관료로 등급화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습니다. 울진 봉평 신라비(524)는 이와 같은 법흥왕 대의 국가 체제 정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또 법흥왕은 상대등을 설치(531)하여 재상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골품 제도도 정리하고 이차돈의 순교(527)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535)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했습니다.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함으로써(536)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법흥왕은 백제를 통해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수교하였으며,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했는데,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 동맹(522)을 맺었습니다. 한편 금관국주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합병하여(532) 낙동강으로 진출하는 길목을 열었습니다.

  3. 진흥왕(540~576) :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545)하게 하였습니다. 중앙 관제로서 품주를 설치하고(565), 지방에는 국원경(557) 및 사벌주, 신주(553), 비사벌주, 비열홀주(556)를 설치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또한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략하여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빼앗았습니다(551). 이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버렸습니다(553). 진흥왕은 국력의 팽창에 힘입어 자신을 제왕이라 칭하며 ‘개국’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하였습니다(551).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됩니다.
     진흥왕은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여 옛 옥저와 동예를 통합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562)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습니다. 창녕지역에 진흥왕 및 사방군주가 모여 무력시위를 하고(561),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가 가야연맹의 근거지인 대가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562).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551)와 북한산(555), 창녕(561), 마운령(568)과 황초령(568) 등에 세운 순수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단양 적성비를 통해 한강 상류 장악, 북한산비를 통해 한강 하류,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를 통해 함경남도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금석문들
     중원 고구려비 : 한반도(충주)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줍니다. 또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 414년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 있습니다. 능비의 비면은 1880년 무렵 청나라 농부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사택지적비 : 의자왕 때의 좌평인 사택지적이 남긴 비로,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울진 봉평 신라비 :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며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은 사탁부를 관칭하고 있습니다. 17관등과 외위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북한산비 : 순조 16년에 김정희가 북한산 승가사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창녕비 : 토지, 산림 등 경제 관계의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갈문왕, 상대등 등 중앙의 주요 관직 외에도 지방의 중요 관직 명칭, 재지 유력자(촌주)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황초령비 : 철종 3년(1852) 관찰사 윤정현이 옮긴 비로 진흥왕 대 신라 동북경이 함흥 지역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마운령비 : 최남선이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하고 널리 소개한 비입니다. 진흥왕이 영토를 함경도 함흥 지역까지 넓혔음을 보여줍니다.

     남산신성비 : 신라 지방 통치와 관련된 관직인 도사, 촌주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임신서기석 : 신라에서 유교를 널리 수용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입니다.

4. 가야

  1. 연맹체 형성 : 낙동강 하류의 변한 12국에서는 기원 전후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남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본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경북 함창의 고령가야, 고령의 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가 그것들입니다. 실제로 가야 지역에는 10여 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2. 전기 가야 연맹 : 전기 가야 연맹은 3세기경에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금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쳤습니다. 금관가야는 철이 생산되고, 농지가 비옥되여 벼농사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연맹의 중심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백제의 정복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가야는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3. 후기 가야 연맹 : 그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습니다. 경남 해안 지대에서는 고분 유적의 수나 규모가 위축된 반면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에서는 점차 많은 고분이 축조되었고 그 규모가 매우 커진 것이 그것을 반영합니다.
      고령 지역은 농업 생산성이 높았고 전기 가야의 전신 문화를 잘 계승하였으며 제철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5세기 경남 해안에 선진 문화의 파급으로 철산지가 개발되면서 급속히 발전되었습니다. 5세기 말~6세기 초 대가야는 서쪽으로의 영토 개척을 더욱 추구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 남원, 임실 지방까지 진출하는 등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영역 팽창 과정에서 백제와 대립하면서, 백제는 가야를 사이에 두지 않고 직접 왜와 교역하기를 모색하였습니다. 백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에서 대가야는 소외되었으며,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6세기 전반에 대가야 연맹 왕국은 백제, 신라 등의 침략을 받아 그 남부지역부터 축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4. 가야의 멸망 : 가야의 남부 소국들이 대가야를 불신하여 다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을 형성하게 되자, 신라 법흥왕은 백제와 왜의 세력이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여 병합하였습니다(532).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대가야는 자체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 그 세력이 약화되어 신라 진흥왕 때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가야는 삼국과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5. 가야의 경제, 문화 :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를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고령, 합천 등의 지역에 있던 대가야 연맹 왕국은 농업의 입지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습니다. 가야는 일본의 큐슈와 거리상 가까워서 많은 사람들이 큐슈로 이동하여 소국을 건설했습니다.
      가야는 경남 해안 지방으로부터 토기의 제작 기술이 보급되고 수공업이 일어나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가야의 토기는 일본 지역에 전해져서 스에키 토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가야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북천동 고분 등이 유명합니다. 이들 고분에서 금동관, 철제 무기와 갑옷, 토기 등이 발굴되어 가야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고령 지산동 45호분과 창녕 교동 등에서 순장이 행해진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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