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국사] 8.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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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공무원 한국사] 8. 고대 사회의 발전.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1. 통일신라

1. 골품제도

  1. 골품제도의 형성 : 신라의 골품 제도는 신라 6부 소속의 귀족과 지방의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각기 별도의 체제로 성립하였습니다. 그 후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족 내부에서 다시 성골이 분리되어 성골과 진골이라는 2개의 골과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 등 모두 8등급의 신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 골품제도의 특징 :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일단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 골품제도는 개인 신분뿐만 아니라 그 친족의 등급도 표시하는 것을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인의 일상 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이었습니다.

  3. 신라의 신분 계층 : 신라의 신분 계층 중에서 성골은 김씨 왕족 가운데에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습니다.

    진골은 처음에는 김씨 왕족 중에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성골이 없어진 뒤로는 진골에서 왕이 배출되었습니다. 김씨 왕족 이외에도 전 왕족이자 왕비족인 박씨와 금관가야의 왕족이던 신김씨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집사부의 장관직인 중시(후에 시중이라 개칭)나, 중앙 행정 관부인 여러 부의 장관인 영은 대아찬 이상이어야만 취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골이 독점하였습니다.

    6두품은 왕족의 혈통이 아닌 일반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득난이라고도 합니다. 원광, 원효 등 종교 활동이나 강수, 설총 등 학문적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다만 6두품은 6관등 아찬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중앙 관청과 지방의 장관,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집사부 시랑이나 부의 경 등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 승진의 한도가 제한되었습니다. 지방인들은 골품제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촌주는 5두품이나 4두품에 해당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방관을 보좌하여 촌의 행정과 노동력 혹은 공부의 징수를 맡았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부터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습니다.

  4. 중위 제도 : 중위 제도는 골품 제도의 폐쇄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제한된 관등을 넘지 않고 승진을 할 수 있는 내부 승진 제도입니다. 6두품에게는 상한선인 아찬에 중위를 설정해 4중 아찬까지, 5두품에게는 제10관등인 대나마의 경우 9중 대나마까지, 제11관등인 나마의 경우 7중 나마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 신라 중대

통일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삼국 통일 이후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습니다.

  1. 사회 변화: 일단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습니다.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불교식 왕명 대신 태종 무열왕과 같은 유교식 왕명을 사용하고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웠습니다. 또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습니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의 정치 사회적 비중은 여전히 컸습니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고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였습니다. 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습니다.

  2. 신문왕 : 신문왕(681~692)은 장인인 상대등의 김흠돌의 모역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딸이 출궁된 이후 무열왕의 사위였던 김흠운의 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족내혼은 왕족 김씨가 진골 귀족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권력을 독점하려 한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682년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만파식적은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호국용이 되기 위해 대왕암에 장사지냈다는 전설과 아울러 통일 후의 국태민안과 왕권 안정에 대한 염원과 자신감이 반영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신문왕은 왕권의 전제화를 위해 통치 조직의 정비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치 사상으로 유교 정치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14관부의 중앙 정치 기구와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고,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문무 관리에게는 관료전(687)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689)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관료들의 농민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성덕왕 : 성덕왕(702~737) 시기에 왕권은 더욱 안정되고 유교 정치는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농민들에게 정전(722)을 지급하여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켰습니다. 또 성덕왕이 파견한 신라 사신은 당 현종으로부터 공식 사절로 대접받고 성덕왕은 신라왕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절의 왕래와 문물 교류가 활발해졌고 신라는 2년에 1회 정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습니다.

  4. 경덕왕 : 경덕왕(742~765) 때에는 중앙 관제의 칭호와 지방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 한자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벌주를 상주로, 완산주를 전주로 바꾼 것이 그 예시입니다.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경덕왕 10년에 2천 칸이 넘는 거대한 불국사를 짓는데 국가가 후원한 것이나, 16년에(757)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한 것이 그것입니다.

  5. 혜공왕 : 혜공왕(765~780) 4년(768)에는 최고 관직인 각간의 자리에 있던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33일 동안 왕궁을 포위하였습니다. 이 반란은 96명의 각간이 왕경과 각지에서 서로 다투어 3년이나 끌었다고 전해집니다. 왕의 실정과 진골 귀족 간의 마찰이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대아찬 김융의 반란, 이찬 김은거와 염상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찬 김지정의 반란(780) 후에는 상대등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되었습니다.

3. 신라 하대

  1. 왕권의 약화 : 선덕왕(780~785)은 내물왕의 10대손이고, 선덕왕 뒤의 원성왕(785~798)도 무열왕계 김주원을 밀어내고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선덕왕 이후로 무열왕의 직계 자손에 의한 왕위 계승은 무너졌습니다.

    헌덕왕 14년(822) 김헌창은 김주원의 아들로서, 웅주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고 했습니다. 장안국은 한때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등 전라도 지역과 상주, 진주 등 경상도 지역 그리고 원주 등 강원도 지역까지 장악하여 큰 세력을 형성했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다시 한산에 도읍을 두고 저항을 계속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습니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혜공왕이 죽은 뒤 155년에 걸쳐 20명의 왕이 바뀌었습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쫓겨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군대를 빌어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신무왕입니다. 하지만 신무왕은 즉위하던 해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839~857)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맞아주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문성왕이 이를 거절하자 불만을 품고 판란을 일으켰지만 문성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는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습니다. 집사부의 중시 대신에 상대등의 권위가 올라갔습니다.

  2. 사회의 동요 : 신라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의 정권 다툼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지방의 토착 세력과 사원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유력한 신흥세력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지방의 자영농들은 귀족들의 농장이 확대되면서 몰락해갔습니다.

    9세기 이후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습니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습니다. 더욱이 중앙 정부의 통치력 약화로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농민이 더 많은 조세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었습니다.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진성여왕 3년(889)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의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갔습니다. 죽주에서 기훤이, 원주에서는 양길이, 전주에서는 견훤이 일어나서 농민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또 진성여왕 10년(896)에는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이라고 불리는 반란군이 서남해안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주 외곽까지 진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3. 6두품 :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치원은 당에서 돌아오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신라 말의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에 부딪쳐 뜻이 좌절되자 은둔하였습니다. 다른 6두품들은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최언위가 왕건에게 협조하고, 최승우가 후백제 견훤의 참모가 되었습니다.

  4. 호족의 대두 :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호족들은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호족은 관반이라는 나름대로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중소 호족과 지배, 예속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호족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영역 안의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였습니다. 호족은 다양한 계층에서 성장하였습니다. 토착 세력인 촌주층, 해상 세력, 군진 세력, 부유 자영농과 중앙의 진골 가운데 왕위 계승에 패배한 귀족이 연고가 있는 지방에 낙향하여 자립한 세력, 지방관 출신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호족의 유형

  1. 촌주층 : 가장 전형적인 지방 호족이면서 당시의 대다수 호족을 구성한 집단입니다. 신라의 촌주는 군현 아래의 몇 개의 촌락을 관장하면서 그 직책에 따라 많은 토지가 주어지고 있어서 해당 촌락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2. 낙향한 귀족 : 중앙의 귀족들이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한 경우입니다.

  3. 초적적 성격 : 내륙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주로 약탈을 많이 해서 무리를 구성한 초적들입니다. 양길, 궁예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들은 출신 위주가 아니라 농민 봉기나 유이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중앙 세력에 반기를 든 경우가 많습니다.

  4. 군진 세력 : 군진은 원래 변경의 영토 관장을 위해 설치된 것입니다. 삼척에 있는 북진(무열왕 5년), 황해도 평산에 패강진(선덕왕 3년)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해상 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해적의 피해가 잦아지자 해안의 요충지에도 군진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흥덕왕 3년 완도의 청해진, 흥덕왕 4년 남양의 당성진, 문성왕 6년 강화의 혈구진 등이 그것입니다. 역시 장보고가 대표적입니다. 장보고는 당의 서주 무령군 조상 출신으로 귀국 후 흥덕왕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5. 해상 세력 : 해상무역은 신라 하대에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이후에 활발하였습니다. 국제 무역 상인들이 활약하던 곳은 송악과 진주 그리고 나주 등지였습니다. 이중에 송악은 예성강 하구에 있으면서 주변에 패강진과 혈구진이 가까이 있어 대당무역이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작제건이 대표적이며 작제건의 손자가 왕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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