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국사] 1. 선사 시대의 전개 –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

선사시대.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

‘선사 시대’의 전개

1. 구석기 시대

 · 선사 시대 중 우리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입니다. 구석기 시대도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 구석기 시대의 구분

  1) 전기 : 기후가 따뜻하여 열대 동물과 함께 공존하면서 짐승이나 물고기 혹은 나무열매를 채취하여 먹고 살았으며, 집은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했습니다. 당시에는 큰 석기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으며 대표적으로 주먹도끼, 찍개 등을 사용했습니다.

  2) 중기 : 기후가 추워지면서 생태계가 변화하였고, 불을 발명하게 됩니다.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솔질을 하여서 석기를 만들었습니다. 밀개, 글개, 새기개, 자르개, 찌르개 등을 사용했으며 한 개의 석기가 하나의 쓰임새를 가지게 됩니다.

  3) 후기 : 동굴에서 벗어나 땅을 파고 위에 지붕을 덮은 움집을 짓고 살기도 했으며, 개나 물고기 등을 조각하는 등 예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주로 사용된 도구는 슴베찌르개가 있습니다.

 * 구석기 시대 유적지

  · 함북 종성 동관진 유적 :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구석기 유적입니다. 1933년.

  · 함북 웅기 굴포리 : 조개더미 밑의 지층에서 밀개가 출토되었고, 이후 2개의 구석기 문화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 주먹도기, 찌르개, 외날긁개 등 다양한 뗀석기와 다량의 동물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 : 한반도 내에서 청므으로 구석기 시대의 인골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 평양 만달리 동굴 : 만달사람으로 명명된 많은 사람뼈 부분과 뼈연모, 석기, 동물 화석이 출토되었습니다.

  · 충남 공주 석장리 : 1960년대 남한 최초로 발굴, 조사된 구석기 유적입니다. 구석기 전기~후기 유물이 모두 출토되었습니다.

  · 경기 연천 전곡리 :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 유적지입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 충북 청원 두루봉 동굴 : 완전한 사람 뼈와 석기, 동물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 유골이 출토되었고 이를 ‘흥수 아이’라고 부릅니다.

  · 충북 단양 금굴 유적 : 1980년대 발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지입니다. 찍개, 주먹도끼, 동물 화석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 충북 단양 상시 유적 : 동굴이 아닌 바위그늘 유적입니다. 남한에서 최초로 호모 사피엔스의 인골이 출토되었습니다.

  ·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 : 구석기 후기 유적지로 주먹도끼, 긁개, 찌르개, 슴베찌르개 등과 주술적인 의미의 예술품 역시 발견되었습니다.

  · 제주 빌레못 동굴 : 갈색곰, 사슴, 노루 등의 동물 화석과 석기 등이 수집되었습니다.

 * 구석기 시대의 경제생활 

  ·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점차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입니다.

 * 구석기 시대의 사회생활

  ·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이동 생활을 하였습니다. 무리 중에서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권력을 갖지는 않았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습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상원의 검은모루, 제천 창내, 공주 석장리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막집 자리에는 기둥 자리, 담 자리 및 불 땐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집터의 규모는 작은 것은 3~4명, 큰 것은 1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 구석기 시대에는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을 이용하여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물에는 구석기 사람들이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깃든 것으로 보았습니다.

2. 중석기 시대

 ·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습니다. 새로운 자연환경에 대응하고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적합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단 큰 짐승 대신 토끼, 여우 등 작고 빠른 동물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석기들은 더욱 작게 만들어진 잔석기로서,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이음 도구에는 톱, 활, 창, 작살 등이 있었습니다. 한편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동식물이 번성하여 사람들은 식물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많이 하였습니다.

3. 신석기 시대

 ·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천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약 1만년 전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는 지금과 거의 비슷한 따뜻한 기후로 바뀌었습니다. 이에 따라 생태계도 지금과 비슷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생활방식을 만들어갔습니다.

 1) 유적과 유물

  · 조개더미 : 조개더미는 패총이라고도 하는데 선사 시대 사람들이 잡아먹은 조개껍데기를 버린 곳입니다. 이것들이 화석화되어 현재까지 유적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조개더미로는 부산 동삼동웅기 굴포리지역이 있습니다. 웅기의 조개더미에서는 그릇, 돌화살촉, 집터 무덤 등이 발견되었는데, 무덤에서 나온 인골은 머리가 동쪽으로 향해 있었으며, 집터에서는 난방 시설이 발굴되었습니다.

  · 간석기 :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부러지거나 무디어진 도구를 다시 갈아 손쉽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단단한 돌뿐만 아니라 무른 석질의 돌도 모두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돌을 가는 기술을 터득하면서 도구의 형태와 쓰임새가 다양해졌고, 날카로운 칼과 창 그리고 화살촉 등도 만들었으므로 생활이 전보다 편리해졌습니다.

  · 토기 : 신석기인이 발명한 최대의 기술 혁명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활이 나아졌습니다.

 * 신석기 시대 토기

  1) 전기 : 제주도 한경 고산리, 강원 고성 문암리,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웅기 굴포리 서포항 등 바닷가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 이른민무늬 토기 : 바닥이 둥글고 무늬가 없습니다.
   · 덧무늬 토기 : 밑이 평평하고 몸체에 울퉁불퉁한 덧띠를 붙입니다.
   · 눌러찍기무늬 토기 : 몸체에 무늬를 눌러 찍습니다.

  2) 중기 :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봉산 지탑리, 웅기 굴포리, 대동강 유역의 청호리 등 전국 각지에 분포합니다.

   ·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 시대 대표 토기라고 부를 만하며 도토리나 달걀 모양의 뾰족한 밑 또는 둥근 밑 모양을 하고 있으며, 토기 표면을 누르거나 찍거나 그어서 빗살처럼 생긴 무늬를 새깁니다.

  3) 후기 : 청진 농포리, 평남 온천 궁산리, 부천 시도, 봉산 지탑리, 춘천 교동 등에 분포합니다.

   · 변형 빗살무늬 토기 : 그릇 밑이 평평하고, 몸체에 물결무늬, 번개무늬, 타래무늬 등 동적인 무늬를 그린 채색 토기입니다.

 * 신석기 시대의 경제 생활

  1) 농경 생활 : 농사를 짓게 되면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사의 발전에 첫 번째 중요한 사건으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괭이, 돌삽, 돌보습 등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갈돌에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채집 생활 :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고기잡이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주로 활이나 창으로 사슴류와 맷돼지 등을 사냥하였고, 여러 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돌이나 뼈로 만든 낚시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또 굴, 홍합 등 많은 조개류를 먹었는데,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잡아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씨족별로 대략 20~30명씩 무리를 지어 사냥과 고기잡이, 채집 등을 행하며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사냥과 고기잡이에서는 도구와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공동 노동을 하였고 채집 생활도 함께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3) 원시 수공업 및 기타 :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 후기에는 가축의 사육도 시작되어, 돼지와 개 등을 가축으로 기르기도 했습니다.

 * 신석기 시대의 사회 생활

  1) 주거 생활 : 도구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되자 주거 생활도 개선되어 갔습니다. 집터는 대개 움집 자리로,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입니다.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해있습니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했습니다. 집터의 규모는 4~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습니다.

  2) 사회 생활 : 신석기 주민들은 혈연을 바탕으로 씨족 단위로 모여서 독립된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생산 활동과 제사 활동을 공통으로 했는데, 다른 씨족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에는 벌을 받거나 무력으로 응징을 받았습니다. 씨족원은 경제적으로는 배타적으로 살았지만, 같은 씨족원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고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족외혼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인 풍습으로 부족을 이루었고, 부족을 대표하는 부족장은 씨족장이 모여 뽑았습니다. 부족 사회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같이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고, 연장자나 경험이 많은 자가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등 사회였습니다.

* 원시 신앙 :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애니미즘 :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습니다.

  2) 샤머니즘 :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것입니다. 원시 시대의 씨족장이나 부족장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군장은 바로 무당이었으며, 단군 왕검도 일종의 무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영혼, 조상 숭배 :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태양신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머리를 놓고 매장했으며, 쓰던 그릇과 화살촉 등을 함께 묻어 영혼이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게 했습니다.

  4) 토테미즘 :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단군 신화에서는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배하는 부족이 서로 경쟁하다가 곰 토템족이 승리하여 왕비족이 된 사실을 반영합니다.

  · 기타 예술 활동으로는 주로 흙을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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