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한국사] 4. 국가의 형성 3. 여러 나라의 성장

여러 나라의 성장

국가의 형성 3.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1. 후기 철기 시대

1) 형성 과정

 위만 조선이 있었던 기원전 2세기 경에 남쪽에는 진이 있었으며, 여기에서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1세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더불어 부여, 동예, 옥저 등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2) 발전

 부여 및 마한의 목지국은 왕을 칭할 정도로 연맹 왕국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동예, 옥저, 삼한의 소국들은 연맹 왕국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통합되었습니다.
 부여와 초기 고구려에는 가,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호민을 통하여 읍락을 지배하는 한편, 자신의 관리와 군사력을 지니고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호민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들로 마을은 호민(거수)의 주재 아래 하나의 생활 단위를 이루어 대가들의 지배를 받는 체제였습니다. 하호는 농사에 종사하는 평민이었습니다. 이들은 호민과 지방관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한편 읍락의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천민층이었습니다.

2. 부여

1) 부여의 정치

 고조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나라가 바로 부여입니다.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상류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예맥족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부여의 전성기인 기원 전후 시기의 영토는 북으로 흑룡강 이남, 남으로 백두산에서 요하 상류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연해주까지 미치는 광대한 국가였습니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습니다. 이들 가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습니다. 가가 다스리는 지역의 규모는 수천 호 혹은 수백 호를 헤아렸다고 합니다. 부여 초기에는 국가의 주요 정책을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귀족들이 토의했으며, 죄인을 재판하여 처형하거나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가들은 왕들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입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부여는 북방의 선비족과 남방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한, 위, 진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부여는 기원후 3~4세기에 선비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나라가 쇠퇴하다가, 494년(문자왕)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었습니다. 비록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여의 사회

 부여의 신분 제도에는 일단 귀족인 가가 있고, 그 밑에 호민으로 불리는 지배층이 있으며, 그 아래에 민, 하호 그리고 맨 아래에 노비가 있었습니다. 노비는 전쟁 포로, 채무자 혹은 살인자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호민층 이상이 소유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호민과 민이 무장하여 싸웠으며, 하호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부여의 법으로는 대표적으로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선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도련님의 취하는 형사취수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취수혼의 풍습은 흉노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도 행해졌으며 고구려에서도 있었습니다. 이는 인적 자원의 보충을 위한 제도적 장치이면서, 죽은 형의 재산과 어린 자식의 분리를 방지하여 가족 제도를 옹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습니다.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습니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습니다.

3) 부여의 경제 및 풍속

 부여는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습니다. 관리들의 이름을 가축에서 따온 것도 목축이 성행했음을 보여 줍니다. 특산물로는 말, 모피, 주옥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부여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상의와 겉옷,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국외로 나갈 때에는 비단으로 수를 놓은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습니다.

 부여인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습니다. 이를 우제점법이라고 합니다.

 한편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한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여 일반적으로 후장을 하였습니다. 또 주인이 죽으면 노비는 산 채로 함께 매장하는 순장 제도가 있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1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여에서 죽은 지 5개월이 지날 정도로 상주는 장사를 속히 끝내려 하지 않고 남의 강권에 의해 행하는 것을 예절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고, 또한 많은 부장을 하였습니다.

3. 고구려

1)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습니다(기원전 37).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습니다. 지리적으로 서쪽의 요동, 동쪽의 동해안, 북쪽의 송화강 유역, 남쪽의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여 약탈 경제가 발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습니다. 기원후 3년에 수도를 압록강가의 국내성(집안)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습니다.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습니다.

2) 5부족 연맹체

 고구려의 5부는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였습니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지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중요한 국사는 왕과 왕족 및 부의 대가들이 회의를 열어 처리했습니다.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3) 고구려의 풍습

 고구려에는 서옥제(데릴사위제)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한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것입니다. 여자 집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살다가 자녀가 성장한 후에야 처자를 본가에 데리고 갔습니다. 이는 사위가 처가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노동력을 봉사했다는 점에서 봉사혼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고구려인은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 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함께 모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 금, 은의 제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였습니다.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었습니다.

4. 옥저와 동예

1) 옥저와 동예의 특징

 옥저와 동예의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에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조선에 복속해 있었던 옥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임둔군, 낙랑군 산하로 들어갔으며, 족장들은 후, 읍군, 삼로 등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기원후 1~2세기 태조왕 때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토산물을 짊어지고 천리 길을 걸어서 고구려에 공납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동예 역시 고조선에 복속해 있다가 나중에 한 4군 치하로 들어갔으나, 뒤에는 고구려에 병합되었습니다.

2) 옥저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풍속으로는 소와 말이 적고 보전을 잘 하였습니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로, 음식과 주거, 의복, 예절이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나 장례와 혼인 풍속은 서로 달랐습니다.

 민며느리제는 일종의 매매혼이었습니다. 생활이 곤궁하여 딸을 양육할 수 없을 때 장차 아내가 될 것을 전제로 남자의 집에 가서 자라 성인이 되면 친가로 돌아와 있다가 남자 측에서 대가를 지불한 후 시집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를 재산으로 치고, 딸을 줄 때에 양육비를 지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습니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습니다.

3) 동예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습니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는 기록도 동예의 생산 기반이 농업에 토대를 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는데 이는 농경 사회의 추수감사제의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생산 활동에서 차지하는 농경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풍속입니다. 동예는 금기 사항이 많아 사람이 병들거나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곧 새집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집의 구조는 움집으로 주거면이 땅 밑으로 20~50cm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 집자리와 함께 呂(여)자형, 凸(철)자형 집자리가 있습니다.

동예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 외부의 간섭과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상태에서 씨족 사회의 유풍을 오래 유지했습니다. 일단 같은 씨족 내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재사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호랑이를 산신으로 섬기던 원시 시대의 풍습이 잔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각 부족마다 생활권이 구분되어 있어서 사냥이나 어로, 농사 등의 경제 활동이 자기 구역 안에서만 행해졌습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풍속은 지역 주민의 생활 안정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 존재한 벌칙이었습니다.

5. 삼한

1) 연맹체 형성

 한강 이북의 예맥족이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을 건설해 갈 무렵, 한강 이남의 한족 사회에서도 정치적 통합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진은 기원전 2세기 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습니다.

 마한은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습니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만여 호였습니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습니다. 이 지역은 중국과의 교통이 편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하여 고조선에서 망명하는 정치 집단이 가장 먼저 정착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습니다.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4~5만 호였습니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5천 호, 작은 나라는 600~700 호였습니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의 김해, 마산 지역은 해로가 발달하여 바다를 통해 외부 세력이 쉽게 들어오고, 이 많이 생산되어 일본과6 낙랑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 변한입니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과 경주 지역에는 위만 조선의 지배층이 대거 남하하여 진한을 형성했습니다.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습니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2) 국가 구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습니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습니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괭이, 보습, 낫, 호미 등 각종 철제 농기구가 만들어졌는데, 경남 의창 다호리의 무덤에서 철제 농구가 발견된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또 기후가 따뜻하고, 우량이 풍부하며 저수지가 많아서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삼한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전북 김제의 벽골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 같은 저수지는 마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삼한은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습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 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습니다. 삼한에서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 수릿날에는 기풍제를 지내고,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습니다.

삼한에서는 널무덤을 매장 주체부로 하여 무덤 둘레에 물도랑을 돌린 주구묘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고 독무덤도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무덤 속에 부장품을 넣었는데 이는 사람은 죽지 않고 하늘로 돌아가 영생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진, 변한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함께 묻어 주었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삼한은 문신의 풍속이 있었고, 진, 변한 지역의 특이한 습속으로 편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편평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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